재미 있었어요, 좋았어요.

우은희 목사
우은희 목사

어떤 연유에선지 근 1년 다니던 교회를 쉬고 있던 여고 동창이 지금의 대학로 31번길 10, 새롭게 단장한 예향교회의 봉헌예배 이후 우리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 되었다.

나는 예산으로 내려와 교회의 자리 잡느라 연락도 못하고 지냈는데, 우연히 이 동창은 내가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과 이전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부부가 함께 나오고 점차 자녀들도 나오게 되어 말그대로 '수평이동'으로 '부흥'하는 것을 경험하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현재는 권사로 교회의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된 김명주 권사는 예산여고 3학년 8반 반장이었고, 나는 같은 반 부반장이었다. 그때도 따뜻하고 성실한 리더십으로 선생님과 학생들을 잘 섬겼던 모범적인 반장이었는데, 우리 예향교회에서도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예배와 성례전에 있어서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역할이 있고, 나머지 시간에 김명주 권사는 ‘반장’과 같은 역할로 학생 성도들을 챙겨주는데 그때엔 나는 자연스럽게 마치 이 교회의 ‘부반장’처럼 뒤로 물러나 있게 된다. 서로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 주께서 맡기신 분야를 맡아서 함께 예향교회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의 남편인 이정희 권사님은 처음에는 신앙이 없었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와 주는 거'라고 고백했었다. 여전히 성실하게 교회에서 그분 나름의 자리를 지키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봉사한다. 이 가정이 없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에 놀라고 감사를 드린다.

또 한 가정은 내가 개인적으로 참 힘들었던 시기에, 역시 그녀도 힘든 상황을 겪게 되면서 우리 교회를 찾아온 가정이었다. 나이만 많았지 삶의 경험들이 너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이해력도 공감력도 부족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녀의 문제를 '네 문제로 알고 기도해라, 그녀의 아픔을 너의 아픔으로 안아라, 함께 인생의 문제를 풀어나가라'는 뜻으로 우리 교회에 보내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었다.

이 사랑하는 예산여고 후배, 하혜경 권사는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고 활기차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장치라고 생각하는 바, 흐르는 시간 속에서의 자연 치유, 상처의 복원이 이루어져서 어떤 때는 목사와 성도, 또 어떤 때는 마음과 생각을 나누며 서로 의지가 되는 선후배로 지내고 있다. 어려운 중에도 남매를 잘 키워 아들은 신학생으로, 딸은 앞으로 교사가 되기를 꿈꾸는 교육학과 대학생으로 자기의 길들을 잘 개척해 나가고 있다.

4번째 교회 생일,  곧 너희의 생일이지
4번째 교회 생일, 곧 너희의 생일이지

처음 ‘나의 목회’에 대한 글쓰기를 요청받았을 때, 선뜻 쓰겠다고 말하기 어렵게 했던 나의 목회의 지점은 여기였다.

개척하고 대략 8-10년쯤 지나게 되자, 우리 어린 성도님들이, 공주대학교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의 사랑과 지도를 받기만 하다가 드디어 그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이 동갑내기 친구, 또는 후배들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이 공주대 언니 오빠들은 각자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배웠을 뿐 아니라, 고향을 떠나 타지 이 낯선 곳 작은 교회에서조차 여러 예배에 참여할 만큼의 신앙생활, 선교단체에 가입하여 선교를 배우고 예배와 성경 말씀 배우기에 열심을 내서 정말 내가 더 가르칠 것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한편 우리 어린 성도님들이 교회에 발을 들이고 교인이 되기 시작하여 중등부와 고등부를 지나, 이제 드디어 스무살 청년이 되었으니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진지하게 신앙과 인생을 반추해야 하는 시기, 나는 그들이 필요하고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한 때에 그들은 고향을 떠나, 예향을 떠나 서울로, 대전으로 유학을 갔다.

아마 지방이든 도시든 교회 청년사역의 어려움 중 하나가 대학 입학으로 고향을 떠나 흩어져서 기존의 교회 교육이 일관되게 이어지지 않는 일일 것이다. 주말에 혹 고향으로 돌아와도 바빠진 20대의 일상에 교회는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따금 예배에 참여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의 주인은 공주대 청년들로 바뀐 거 같고, 전과 같지 않아서 허전했을 그 오래된 성도, 기존의 우리 어린 성도들의 마음을 그때 나는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저 내 노력없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열심 청년들’과 드리는 뜨거운 예배로 내 목마름을 채우느라 우리 어린 성도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흩어진 어린 성도들이 있는 자리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더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했어야만 했다. 이 부분이 지난 나의 목회에서 가장 아프고 후회되는 지점이다. 지금은 30에서 20대의 나이, 흩어져 살고있는 이 어렸던 예향 성도들을 위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숙제가 있어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후로 우리 교회는 주로 공주대 학생들이 다니는 교회로 인식되게 된다.

공주대 청년들은 주로 선배들의 안내로 우리 예향교회를 소개받는다. 고향에서 다니던 교단의 교회로 가기도 하고, 전에 언급했듯이 예산 지역은 각 교단마다 교회가 장장 80-100년 넘은 역사를 기록하는 교회들이 있으므로 어느 교단의 교회로 가던지 세월의 시련을 견딘 교회이고 안전하다.

각 교단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는 우리 교회로 오거나, 주일 오전 예배를 각 교단 교회에서 예배하고 점심식사 시간에 맞추어 우리 교회로 와서 그 이후의 시간을 보내거나 한다. 물론 학교 다니는 동안은 내내 우리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는 청년들도 있다.

어색한 첫 해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에는 인사 외에는 거의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경험적으로 만나는 첫 해 두 학기는 이 교회에서 우리가 서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지, 어울릴 수 있는지 보는 기간이다. 교회와 목회자와 멤버들과 맞지 않다 싶어서 떠나는 이들도 있다. 보통은 이렇게 두 학기를 무사히 지나면 겨울 방학이 지난 이듬해부터는 훨씬 친밀해졌다. 3, 4학년 정도 되면 드디어 목회자와 청년들은 친구가 되었고 동료가 되었다.

‘예향교회가 없었다면 제가 이 4년을 어떻게 살았을까요. 감사합니다.’

남이 다 키워 놓은 청년들과 나는 그저 ‘노는 것’만 같아서 가끔 이것도 목회를 하는 것일까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위로하신 하나님의 따뜻함을 나는 잊지 않는다.

변함없는 나의 고백도 ‘감사합니다. 여기 있게 하시고, 이런 일자리 주시고, 이런 사람들 만나게 하시고, 재밌었어요, 하나님. 재밌어요. 하나님, 이보다 무엇이 더 좋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 때를 기억해, 우리가 주의 궁정에서 맘껏 놀던 시간. 영원한 지금.
그 때를 기억해, 우리가 주의 궁정에서 맘껏 놀던 시간. 영원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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