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교회 출석, 신교육을 받음
-민족주의 사상으로 무장, 비밀조직인 '송죽형제회' 결성
-여성 중심의 강력한 항일 지하운동체 결성에 매진하여

사진 앞줄 왼쪽이 김경희 지사. 오른쪽이 김신희 지사
사진 앞줄 왼쪽이 김경희 지사. 오른쪽이 김신희 지사

 

평소에 형을 사모함은 두 가지 이유니 그중 하나는 세상에 온 후로 아름다운 지조를 일찍이 험악하고 무지스럽고 무정한 세상풍파에 더럽히지 아니하고 32세까지 보관하였다가 가지고 돌아가심이요 또 하나는 충의열사(忠義烈士) 뜻을 받아 오늘날까지 광복사업에 힘쓰셨음이로소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일하던 독립운동가 김원경이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 김경희를 애도하며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1919.10.4)에 쓴 추모사의 일부이다. 오늘 소개 할 ‘역사 속 믿음의 사람’은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순결을 지키며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요절한 김경희이다.

안타까운 것은 김경희의 가정환경과 어린시절에 대해 밝혀 줄 자료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단지 알려진 사실은, 그녀가 평양 출신이라는 것과 그녀의 가정이 일찍이 개화한 집안이라 동생 애희와 함께 여러서부터 교회에 나갔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1897년 선교사들은 교인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초급과정 학교 네 개를 평양에 세웠는데, ‘야소교 소학교’라 불렸다. 김경희는 동생과 함께 신양리에 있던 리(G.Lee) 선교사 소유의 ㄱ자형 단층 기와집에서 배웠다.

평양에는 남자학교가 둘, 여자학교가 둘 있는데 남녀 학교 각각 하나씩은 성 밖에 있습니다. ... 여학교들은 재적이 48명인데 한국인 부인과 리 부인, 베스트 양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성 밖에 있던 학교는 리 부인이 관장하던 것을 웰즈 부인에게 넘겼습니다. 두 학교 모두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딸들의 교육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교인들도 점점 호응을 해 오고 있습니다.

과목은 찬송, 성경암송, 산술, 지리 등이었고 김경희는 한국인 교사 송정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1903년 동생 애희와 함께 1회로 졸업한 후에 숭의여학교로 진학하였다. 숭의여학교는 장로교 선교부에서 1903년 10월에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처음 입학한 43명 중 23명은 시골에서 올라 온 학생들이었다. 1년 내내 수업한 것은 아니고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개월 동안 수업하였다. 1906년부터는 감리교가 운영에 참가하게 되어 초교파적인 학교가 되었다.

1908년 5월, 그녀는 김애희, 김유선, 김보원, 김신보와 함께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동생과 함께 교사로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맡은 과목은 수학과 지리였다. 졸업 성적이 가장 우수했던 동생 애희는 4년 후에 북경으로 건너가 의학공부에 전념하여 의사가 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평양기독교연합병원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숭의여학교 재건을 위해 헌신하였다.

모교인 숭의여학교에서 3년 동안 가르친 김경희는 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로 갔다가 다시 평양의 숭현여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때 그녀는 초기 시절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일병합을 경험했고, 기독교인 민족운동가들이 대거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105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민족주의 독립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1913년은 그녀가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해이다. 숭의여학교 후배이자 모교 교사로 있던 황애덕이 그녀를 찾아와 숭의여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들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녀는 별 고민 없이 승낙했고, 교사 이효덕과 재력을 갖춘 교인 안정석 등이 핵심으로 추가되어 1913년 ‘송죽형제회’가 결성되었다. ‘송죽형제회’는 주로 숭의 출신 졸업생들로 조직된 송(松)형제회와 재학생들로 조직된 죽(竹)형제회를 합쳐서 부르던 호칭이었고, 김경희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조직은 대외적으로는 친목단체처럼 꾸몄으나 회비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거두어 해외에 나가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특히 졸업생들로 조직된 송형제회는 졸업생들의 지방 취업으로 인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출 수 있었다. 이혜경이 원산에서, 서매몰이 부산에서, 박현숙이 전주에서, 황애덕이 서울에서 각각 교회 여성들과 기독교 학교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앙동지회와 기도모임 등을 만들어 비밀조직을 키워 나갔다. 

김경희는 이처럼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를 지휘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투철한 독립사상은 교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에게 교육을 받은 제자의 증언이다.

한번은 지리 시간에 ‘하르삔’이 나오자 이곳이 바로 안 의사(안중근)가 우리나라의 원수 이등박문을 쾌살(快殺)한 곳이라고 설명하고는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에는 이곳에다가 안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말을 하였다. 학생들은 이 수업을 감격과 울분의 교착으로 숨죽이고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애국적 인격에 감동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업 내용이 일 년 만에 발각되고 말았다. 김경희는 경찰에 끌려가 수주일간 그곳에 감금된 채 온갖 악형을 받아야 했다. 김경희는 악형을 이기지 못하여 심한 폐질환에 걸려 병석에 눕고 말았다.

송죽형제회는 삼일운동 이전에 국내에 존재하던 유일한 독립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핵심 멤버들은 삼일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여성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삼일운동 후 본격화된 독립운동 지원을 목적으로 한 비밀조직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런 조직에 초대 회장을 맡은 김경희는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수업을 진행하다가 1년만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폐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1919년 2월 하순, 상하이에서 온 김순애가 부산과 서울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상하이 및 서울의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동지를 구하려는 목적이었다. 김순애는 친구였던 김애희를 찾았고, 김경희도 동생 애희를 통해 김순애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결핵을 앓고 있었던 그녀는 김순애를 데리고 평양 지역의 동지들을 만나러 다녔고, 송죽형제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만세시위 계획을 주도하였다.

2월 28일 밤, 김순애를 상하이로 떠나 보내는 시간에 그녀는 품 속에서 작은 성경책을 꺼내 어머니에게 주면서 “제가 내일 외출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일 제가 내일 죽지 않고 적의 옥중에 들어가게 되면 이 성경을 들여보내 주십시오”라며 자신의 결의를 밝혔다.

3월 1일의 평양 만세시위는 남산현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시작되었다. 송죽형제회는 태극기 제작과 배포를 맡아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직후 그녀는 평양을 탈출하여 중국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로 가던 중 우연히 임시정부로 가던 김원경을 만났다. 김원경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한 그녀는 임시정부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애국부인회 조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고 국내 귀환을 명령하여 상하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독립신문>에서 그녀가 받은 임무에 대하여 “어떤 사명을 가지고 환국하였더니”라고 쓴 것(1919.10.2)을 보면 중대 임무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여성이 중심인 강력한 항일 지하운동체 결성에 대한 임무였을 것이다. 기존의 송죽형제회와는 다른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구성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하여 1919년 8월경 다시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그때부터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 애국부인회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투병 중인 그녀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결국 폐질환이 악화되어 앓아눕고 말았다. 쇠약해진 육체 때문에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펼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병상에서 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픈 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까지 받던 그녀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19년 9월 19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뜻을 채 이루지 못하고 하늘 품으로 돌아가고 만 그녀가 임종 직전, 나이 많은 어머니와 동지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 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

그녀의 죽음이 상하이에 전달되자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특히 한 방을 사용했던 김원경의 충격은 더욱 컸다. 그녀의 추도사 일부이다.

슬프다. 형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 불일 듯 간절하오나 광복의 사업은 앞으로 갈 길이 태산 같고 소수의 여자계는 무력함이 이러하오니 참아 어찌 이를 두고 가오리까. 맡기신 사임(事任)을 전할 곳이 전무하니 만일이라도 다 하고 가야 후일 형을 대할 낯이 있을지라. ... 아 형아, 나를 사랑하실진대 어찌 이같이 무거운 짐을 쓸어맡기시고 혼자만 주님 슬하에 돌아가시나이까. ... 우리는 살아도 대한 죽어도 대한, 잊지 못할 이 사업을 마친 후에야 죄악에 더럽힌 몸이 영생의 길을 향하리로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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