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굴곡에서 눈물로 지켜낸 믿음의 공동체

삼척제일감리교회 전경
삼척제일감리교회 전경

인천 제물포에서 강원도 삼척까지 자동차로 달리면 고속도로를 이용한다는 가정 하에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1885년 제물포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삼척까지 가는데는 그보다 훨씬 많은 2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1912년 4월 19일 삼척 북평(현 동해시) 출신 한학자 김한달이 삼척군 부내면에 기도처를 정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삼척선교의 시대가 열렸으니 1885년으로부터 27년이 흐른 셈이다. 옛 삼척도호부 동헌 인근이자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竹西樓) 앞으로 추정된다. 삼척지방의 모교회로 지방 선교의 든든한 뿌리를 내린 이 기도처가 지금의 삼척제일교회이다.

현재 자리잡고 있는 문화예술회관 앞에는 삼척 시내를 관통하는 오십천이 흐르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다와 맞닿는 곳이 삼척 시내이다. 오십천 절벽 위로 우리나라 <보물 제 213호> 누각인  ‘죽서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객사 ‘진주관’의 부속 건물이었고, 삼척의 사대부와 이곳을 찾은 방랑시인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준 곳이다.  

삼척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었는데, 바로 동해 바다를 지키던 삼척읍성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가 침탈을 본격화하던 조선말기에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붕괴는 더욱 가속화하였다.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향해 가던 일제는 광물 자원이 풍부한 태백, 삼척 일대를 병참지대로 활용하면서 수탈을 일상화했던 것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불안한 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헌이 식민지 군청이 되고, 크고 작은 관아 건물이 헐리거나 도로로 바뀌어 갔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활기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더구나 삼척은 한반도의 오지였기에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줄 무언가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의 한 줄기 빛이 삼척을 비추었으니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것이다. 1812년 1월 차별없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며 농민 중심으로 봉기했던 홍경래가 진압군의 총탄에 쓰러진지 꼭 100년이 지난 1912년 4월 19일 조선의 동쪽 끝 고을에 찬송이 처음으로 울려 퍼짐으로써 홍경래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의 서막이 열렸다. 이것은 조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언급한 김한달은 초대 전도인이 되어 삼척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전도하였다. 진도나 완도, 제주 같은 어촌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삼척도 바닷가에 위치한 지리적인 환경 때문에 특유의 미신 등으로 인해 냉대와 멸시가 많았다. 하지만, 김한달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수로 인한 구원’을 외쳤는데, 별명이 ‘울벵이 전도사’였을 정도로 멸시와 조롱을 견디며 울면서 전도하였다. 이같은 ‘피눈물나는’ 김한달의 전도로 모인 교인들은 1년 후인 1913년 5월, 한식 목조 세 칸 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계속 부흥하여 이듬해 목조 여섯 칸을 구입했고, 다시 이듬해 목조 여덟 칸을 매입해야 할 정도로 교세가 성장하였다. 

세례 장면
세례 장면

이렇게 시작한 성내동 6번지의 삼척제일교회는 죽서루와 오십천, 그리고 읍내를 눈 아래 두고 강원도 남동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비록 세상의 나라는 일제에 빼앗겼으나 그들에게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는 ‘하나님나라’가 있었다. 1920년대 초반에 현대식 2층 예배당을 봉헌하고 1925년 4월 15일 예배당 1층에서 삼척지역 첫 기독교 교육기관인 삼성유치원을 개교하였다. 유치원은 1930년대 말 공립 직업학교 교사(校舍)로 쓰이기도 하였다. 봉헌과 함께 전도집회를 열어 새신자 32명을 얻었는데 “기쁨에 겨웠던 장임옥 내외가 십일조를 내고 돼지새끼 날 때마다 첫 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로 전환한 1930년대 황국신민화와 더불어 병참기지화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서해안 군산이 일제의 농산물 수탈지였다면, 동해안 삼척은 금, 은, 동, 철, 무연탄 등의 광물 수탈지였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지만, 삼척제일교회는 순회 사경회를 통해 구역 내 천곡, 옥계, 묵호, 북평교회 등을 돌며 영혼구원 활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936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공동체를 무너뜨렸다. 교단적으로 참배를 결정하면서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신사참배 강요가 더욱 심각해진 1940년대에는 이로 인해 많은 교회가 통폐합으로 사라지면서 관제 교회만 남게 되었다. 삼척제일교회도 이 수난의 파고를 피할 수 없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쇄의 길을 택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기모 목사는 폐쇄된 교회에 끝까지 남아 통분의 기도를 하다가 연행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였다. 또한 삼척구역의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왕은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천황에게 절할 수 없다”며 끝까지 항거하다가 투옥되었다. 삼척경찰서, 강릉경찰서를 거쳐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 하던 중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63세의 일기로 옥중 순교하였다. 그 유해가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본교회인 천곡교회로 이장되고 지금은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 한편, 일제는 폐쇄된 예배당을 ‘강원도 토목관구 사무소’로 사용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삼척제일교회 뜰에 세워진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삼척제일교회 뜰에 세워진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혼돈의 일제 말기를 지나 해방을 맞이하여 교회 문을 다시 열었으나 그 기쁨도 잠시 민족끼리 벌인 전쟁으로 인해 교회는 다시 한번 시련을 맞이하였다. 찬바람이 숭숭 드는 목조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눈물의 기도를 드린 날들이었다. 이웃들이 시끄럽다며 예배당에 신발을 던지며 욕설을 퍼붓는 모욕을 참아내며 기도로 지켜낸 교우들의 믿음으로 교회의 역사는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눈물의 기도를 씨앗으로 성장한 교회는 죽서루 앞에서 1987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국내외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특별히 해외선교 부문에서 필리핀, 네팔, 말레이시아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아프리카 피지와 방글라데시에는 학교를 세웠다. 108주년이 된 2020년 현재 재적인원 1천명이 넘는 중형교회가 되었다.

태백산맥의 주봉(主峰)을 이루며 철쭉과 가을단풍으로 유명한 두타산의 정기(精氣)가 흐르는 삼척. 그곳에 예수의 이름을 드높이기 시작한지 108년. 민족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며 이어 온 믿음의 유산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회. ‘성서적 성결한 삶을 통해 교회와 사회 변혁을 주도한다’는 감리교회의 정신을 되새길 때, 삼척제일교회의 역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결코 가볍지 않다.  

예배 모습
예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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