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선 목사(서울연회 노원지방 열방교회)는 오늘부터 '나의 목회' 필진으로 합류했다. 앞으로 월 3회, 목회단상과 더불어 삶의 에피소드를 독자들과 나눌 예정이다.

김별선 목사
김별선 목사

남편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말 한 마디에 아내가 희로애락을 넘나든다는 사실을. 기실 나도 몰랐다. 부모와 친구들의 어떤 부정적인 말에도 끄떡 앉던 내가 그의 말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줄은. 

어릴 때 나는 '못 말리는' 아이였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가 개척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살아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늦둥이로 태어나 형제자매 없이 혼자 커야 했던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 박혀 지루하게 사는 것이 그리도 싫었다. 견디다 못해 고등학교 1학년에 늙으신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서울로 전학했다. 

집 없이 독서실을 거처로 삼았다. 고시원비가 독서실비의 두 세배였기에, 돈 아끼려고 책상 밑바닥에서 웅크리고 자며 생활했다. 독서실에 초라한 살림을 차린 나를 본 같은 반 아이가 독서실에 사는 거지라고 전교에 소문을 냈지만 그러려니 했다. 복도에서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거리며 흘겨볼 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당당한 내가 못마땅했는지, 쉬는 시간이면 서넛 아이가 대놓고 나에게 욕을 했다.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이 찾으신다 속여 교무실을 헛걸음시키거나, 실내화를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려 맨발로 교실과 복도, 화장실을 다니게 만들었다.

별별 골탕을 먹으면서도 그 때 잠깐 속상할 뿐 크게 맘을 쓰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물로 배를 채우며 등록금 때문에 학교 매점에서 근로를 할 때였다. 배고픈 내 앞에, 라면 그릇을 코에 대며 초승달 눈깔로 약을 올리던 아이도 서울 생활에 대한 집념을 꺾진 못했다. 

그렇게 의지할 곳 없어도 꿋꿋하던 마음이었는데,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남편의 말 한마디, 무반응, 표정 하나 하나에 쉽게 무너지곤 했다. 연년생으로 태어난 남매를 독박육아하게 되면서는 정점에 달했다. 아이 둘과 밤낮으로 씨름하며 애쓰고 있을 그 때, ‘오늘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라는 말 한마디가 목말랐던 그 때. 그는 그런 말을 할 줄도 모르고, 해야 되는지도 몰랐다. 그가 나쁜 남편이거나 나에게 애정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래도 정말 힘이 들 때면 가끔이라도 좋으니 듣기 좋은 말을 해 주길 요구했다. 남편은 그 때마다 그런 말은 자기 입에 안 맞는 말이라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도 큰 거 안 바라니 나도 바라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듣고 싶으면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만들라고도 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가 되었다. 그 누구보다 남편에게 이해 받고 따뜻한 말 듣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니 절망스러웠다. 

열 아홉엔 아버지가, 스물엔 엄마가 돌아가시고, 배다른 형제들과의 연도 끊어져 있었다. 신앙 하나로 가난하고 외롭게, 바쁘고 힘겹게 20대의 고비고비를 넘겼다. 어른스럽게 잘 해 내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 마음과 생각이 누구보다 단단하고 성숙하다 믿었다. 이토록 남편이란 존재가 큰 영향을 미칠 줄은 털끝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남편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바닥을 치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지 몰랐다. 남편의 비난에 분통을 터트리고, 작은 미소에 콧노래가 나올 줄 몰랐다. 내가 그렇게 가볍고, 한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라니! 내 모든 것이 남편의 말에 달려 있다니! 인정하기가 참 어려웠다. 

남편은 알까?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내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내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돌아보면, 비단 남편의 말만 그럴까? 사실 나의 말도 남편과 자녀에게 그런 권력을 가졌던 것 같다. 배우자의 말 뿐 아니라 부모의 말, 교사의 말, 목사의 말, 친구의 말 등 세치 혀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며 산다. 아니 알면서도 가장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주변 어디에나 위로와 격려, 사랑의 말이 그립고 절실한 지친 사람들이 있다. 

나태주 시인은 산문집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중 자신의 시 '좋다'라는 시를 인용한 '좋다'라는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인간은 의외로 언어에 의해 지배되는 생명체이다. 
될수록 좋은 느낌, 부드러운 느낌, 아름다운 느낌이 드는 말을 가까이 하면서 
아름답게 부드럽게, 그리고 좋게 살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 고운 말은 아끼지 말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수시로 남발하는 것이 좋은 거 같다.

“오늘 수고했어. 열심히 했네. 오늘 따라 예쁘네. 사랑해. 고생했어.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어쩌면 마음을 담은 이런 말을 잘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하는 묵직한 사명, '이웃사랑'의 중요한 항목이 아닐까 싶다. 

▲말의 힘
▲말의 힘

 

저작권자 © 웨슬리안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