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년, 매서인 복정채에 의해 남양에 복음이 들어오다.
- 은퇴한 이필주 목사, 남양교회 파송받아 전성기를 이루다.
- 새로운 100년을 향해 '은혜체험' 신앙을 강조하는 김진석 목사.

1982년 봉헌된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
1982년 봉헌된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과정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 땅의 영화(榮華)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교회의 역사이다. 그래서 흔히 오늘날의 교회 역사를 ‘사도행전 29장’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낸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일한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이듯이 오늘날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이다.

<뿌리를 찾아서> 코너를 만들고 연재하는 이유는 이 땅에 감리교회가 전파된 지 올해로 135년 되었는데, 100년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고스란히 담긴 교회를 소개함으로써 선조들의 신앙유산을 잇고 감리교인으로 정체성(identity)을 갖자는 의도에서이다.

지난 신갈교회 역사를 더듬으면서 밝혔듯이 복음의 전래과정은 길과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길은 곧 사람과 문물, 그 모든 것의 흐름이자 통로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던 시절에는 육로가 발전되지 못해 배를 이용한 해안지방에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진 경로는 육로와 배를 통한 해안지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해로(海路)를 따라 흘러간 복음

오늘 찾아가려는 교회가 해안경로를 통해 복음이 전해진 경우로 화성지역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남양교회이다. 남양은 해로를 통해 인천과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그 교류의 물결 속에 복음도 동승했던 것이다. 그 시절 남양을 방문했던 복정채 권사는 1901년 <신학월보 1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남양을 소개하였다.

“남양은 황성(서울)서 남으로 일백 리요, 인천항에서는 일백십 리요, 수원에서 오십 리니, 지형은 바다를 향하여 들어가 지면이 열렸는데 서해 중에 있는 일곱 섬이 속하였고, 방면은 13면이오 호수는 육천여 호라 하며, 군읍 호수는 삼백여 호라 하더라. 수로는 충청남도 연해를 접하였으며 서해로는 청국 산동해를 접하였으니 임신 국변에 청국 병이 건너와 유진하던 곳 마산포가 군읍으로 서편 삼십리니 가히 서해 요충지라 할 만하더라. 물산은 염이요, 풍속은 어두워서 무당을 숭상하고 인심인즉 후하고 양반이 많이 사는 땅이라.” (신학월보, 66쪽)

남양은 서해의 요충지로 인천에서 110리 떨어져 있고, 중국 산동해와 접하여 임오군란 때는 마산포에 청국군이 주둔할 정도로 중국과의 교류 요충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통의 요충지인 남양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97년 무렵이었다. 남양교회 홈페이지 연혁에는 1965년 통계표 표기를 근거로 1894년으로 정리했는데, 여기서는 2012년에 발간한 <남양교회 115년사>에 근거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1965년 통계표. 여기에 교회창립일이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을 근거로 교회연혁에는 1894년을 창립년도로 소개하고 있다.
1965년 통계표. 여기에 교회창립일이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을 근거로 교회연혁에는 1894년을 창립년도로 소개하고 있다.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제물포지방 감리사였던 존스(G.H.Jones) 선교사는 1898년 8월 25일 열린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제14차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지난해 우리는 두 군데에서 선교기지를 확보하였으나 단 한 군데에서 계삭회가 조직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연회에서는 제물포, 교한, 홍해, 담방리 ... 8개의 선교기지를 확보하였습니다, ... 그 밖에도 우리는 여러 마을에서 선교사업을 막 시작하였으며 영종과 교동, 남양, 통진, 김포와 해주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장소의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한 명의 사역자를 상주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위 보고에 따르면, 1897년 5월부터 1898년 8월 사이에 영종과 교동, 통진과 김포, 해주 등과 함께 남양에도 매서인이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더불어 상주(常住) 사역자가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좋다는 것이다. 이때 활약한 사람이 매서인 복정채 권사였다. 그러니까 1897년 봄부터 복정채에 의해 남양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몇 사람이 모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를 근거로 남양교회의 시작을 1897년으로 보고 있다.

남양선교의  출발에 함께 한 존스 선교사에 대한 글(역사관 전시)
남양선교의 출발에 함께 한 존스 선교사에 대한 글(역사관 전시)

1900년 7월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1900년 7월 담방리교회를 봉헌하는 예배에 남양교회 교우가 참석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교우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공예배가 이때부터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00년 7월 4일에 담방리교회를 하나님께 바쳤는데, 장로사 시란돈 씨와 목사 조원시 씨와 그부인이 오시고 대한 교우들은 본회 남녀 교우와 부평 굴재 교우와 인천 무지내 교우들과 남양읍 교우가 모였으니 여러 곳 교우가 같이 참여하였고... ”(“교회당을 하나님께 바침”, 5쪽)

남양에서의 공예배에 대한 언급은 1899년부터 나타난다. 향토사학자 홍승길의 증언이다.

“1899년에 남양교회는 존스 선교사가 제물포에서 파송한 복정채가 주로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존스 선교사가 순회 지도하였다. 교인으로는 남양 사람으로 서울에서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받아 신앙생활 하던 홍승하 씨 가정과 홍사두 가정, 한가울에 사는 김홍수(전죽산군수) 씨 가정 외 한 가정, 활화문 김치도 씨 가정 외 두 가정, 글판리 김병권(목사됨) 씨 가정과 이 씨(이동만 씨 부친, 후에 목사됨) 가정 외 한 가정으로 낮예배는 남양읍의 홍승하 씨 가정에서 드리고 밤에는 글판리 김병권씨 댁과 이씨 댁에서 예배를 드렸다.”

1899년에 드려진 예배는 복정채 권사가 인도했으며, 참석한 인원은 남양읍에서 두 가정, 한가울에서 두 가정, 활화문 세 가정에 글판리 세 가정이다. 합하여 10가정이 참여한 셈이다. 주일 낮에는 남양읍에서 예배를 드렸고 저녁에는 글판리에서 모였다.

이 글에서 유추가 가능한 것은 복정채 권사가 남양에 전도하러 가기 전에 이미 그곳에는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믿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복정채 권사가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1899년 이전에 남양읍에 복음이 들어갔고, 믿는 교인이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복정채 권사의 설명에 따르면 1900년 9월부터는 마산포 근처 포막동에서 5명이 새롭게 믿으면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예배를 드렸다. 마산포는 해로를 통해 남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뱃길을 통해 충청도로 연결되고 중국 산둥반도와 접해 있으며, 인천으로 통하는 서해의 요충지인데다 남양 앞 바다에 있는 영흥도, 대부도, 선감도로 통하는 해로의 중심지였다.

마산포 근처에 위치한 포막동은 예전에 포구가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바다를 막아 제방을 쌓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개매기’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 남양읍에 이어 두 번째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복정채의 증언이다.

“또 마산포 근처 포막동에 다섯 사람이 새로 믿는데 금년 9월부터 주일예배를 처음으로 실시하였고 또 그 동리에 언문 아는 부인이 있어서 그 여인이 동리 사는 일가 집에 열심으로 전도하여 그 일가 중 믿는 이가 세 집이더라.” 

포막동 교회는 새로 믿은 다섯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언문을 아는 부인이 일가 친척에게 열심히 전도하여 세 가정이 믿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1900년 남양에는 읍내와 포막동 두 곳에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는 점이다.

남양교회의 성장 모습은 1903년 5월 1일부터 7일까지 정동교회에서 열렸던 19차 선교연회에서 보고되고 있다.

홍승하 목사와 남양교회

“홍승하 형제의 유능한 지도력 하에서 남양 순회 구역은 매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8개의 예배 처소를 가지고 있으며 131명의 입교인과 학습인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들로부터 주님을 위한 일부 사역자들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E.M.Cable, 남양감리교회 115년사, 77쪽 재인용)

홍승하 형제의 활약으로 남양교회는 가파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곧 남양교회 초기 성장은 홍승하 형제를 빼고는 말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들 형제는 자립과 자전을 원칙으로 하여 교회를 개척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베풀기도 했다.

남양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자료 중 홍승하 목사 관련 글(하와이 도착한 시기와 신민회 활동시기는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 115년사, 102쪽 참조)
남양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자료 중 홍승하 목사 관련 글(하와이 도착한 시기와 신민회 활동시기는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 115년사, 102쪽 참조)

초기 남양교회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홍승하가 1903년 하와이 이민자들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출국하면서 남양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02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이민길에 남양에서는 31명이 동행하였고, 전체 이민자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으므로 현지에서 예배를 드렸다. 더불어 복음을 전해 믿는 이들이 늘어났고, 이 모임은 민족운동을 시작하는 거점이 되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의 예배가 시작된 것은 1903년 3월 말경이다. 한인 교인들의 열성에 감동받은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1903년 11월 10일 한인 감리교 선교회(Korean Methodist Mission)를 조직하고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03년 11월 존스 선교사가 담임하던 내리교회에서 하와이로 이민 간 농업 이주민들을 위해 국외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가 홍승하였다. 감리교회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서 1904년 2월 18일 하와이에 도착한 홍승하는 하와이연합감리교회 초대 담임자가 되었다. (*홍승하의 하와이 입국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다. 여기서는 '하와이 이민국의 한인이민자 입국자 명단'을 근거로 한 남양교회 115년사 기록에 따른다) 홍승하가 하와이로 파송된 직후 남양교회는 박세창 전도사가 부임하여 1906년 6월까지 돌보았다.

하와이로 건너간 홍승하는 신민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히 목회와 민족운동을 하던 중 풍토병에 걸려 1년 5개월 후인 1905년 7월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 후 남양에 6칸짜리 얘배당을 건축하고 1907년부터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9년 집사목사(deacon; 현재의 준회원)가 되었고, 1912년 졸업과 동시에 장로목사(정회원)로 안수받았다. 장로 목사가 된 후에는 수원으로 파송받아 남양을 떠나야 했다.

박세창 전도사 후임으로 김우권 전도사가 부임한 남양교회는 1년간 갑절의 성장을 이루었다. 남양이 고향인 김우권 전도사는 1903년 권사직을 받고 교회를 돌보는 사역자의 길에 나섰는데, 능력의 종이었다.

“과거 여러 해 동안 거의 발전을 하지 못했던 남양구역에서는 김우권과 그의 보조자인 이창회 두 사람이 중심도시로 들어갔습니다. 일 년간 이 구역에서 생겨난 열정과 성장과 변화가 놀랍습니다. 모이는 그룹들의 숫자는 2배가 되었고 그곳에 보수 없이 권사로 일하는 훌륭한 청년들의 훌륭한 힘이 있습니다. 6개 마을이 새로 문을 연 것은 이 청년들의 노고와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E.M.Cable, 남양감리교회 115년사, 124쪽 재인용)

이 보고서는 남양교회의 성장에 김우권 전도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말해 준다. 첫째로 모이는 그룹의 숫자가 두 배로 늘었다. 1906년 남양구역은 학습인 312명, 입교인 171명이었는데, 1907년 세례입교인이 436명으로 늘고 구도자가 417명이었다. 둘째로 사역자들이 열심히 활동하자 보수 없이 권사(exhorter)로 일하는 청년들이 생겨났다.

1907년 건축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머릿돌
1907년 건축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머릿돌

이들의 헌신으로 6개 마을에서 새롭게 교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7개였던 교회가 이들의 수고로 17개가 늘어 24개가 되었다. 만 1년이 채 안되는 기간을 섬긴 김우권 전도사 시절에 남양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07년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전도훈련에 탁월했던 김 전도사의 역할이 컸다. 당시 남양구역 담당이었던 벙커(D.A.Bunker 1853~1932) 선교사의 보고에서 드러난다.

“어른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이 선교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활기차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매우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선교사업을 장악하고 있으며 잘 훈련된 장군의 예리함으로 40명이 넘는 전도 희망자를 통솔합니다. 지난 해 동안의 그의 사업은 아무리 높이 치하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D.A.Bunker, 남양감리교회 115년사, 128쪽 재인용)

대부흥운동 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남양교회는 일제시대 민족운동에도 앞장섬으로써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나섰으며 ‘대한자강회’ 지회를 설립하고 여성들로 이루어진 ‘의성회’에 관여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수 개월 동안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간 ‘만세운동’은 남양지역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남양교회를 담임하던 동석기 목사가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당시 동 목사는 수원지방 남양구역 순회 구역장으로서 3.1운동 민족대표로 서명했으나 이후 일원이 되지는 못하였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던 동 목사는 7개월 징역살이를 하였다. 이렇게 민족 문제에 깊이 관여했기에 필연적으로 따랐던 일제의 탄압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삼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동석기 목사가 목회하던 1918년 교우들과 함께 한 장면
삼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동석기 목사가 목회하던 1918년 교우들과 함께 한 장면

탄압 속에서도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기록을 보면 남양구역이 성장하였다. 당시는 임응순 목사가 담담하던 시절인데 본처 설교자가 3명, 권사가 3명 있었다. 수원종로교회와 함께 엡윗청년회가 조직되어 40명의 청년회원이 있었다. 교회 출석인원은 239명이었고, 성인과 어린이 대상의 주일학교가 1개씩 있었다. 1924년에는 임응순 목사와 함께 본처 전도사 1명, 권사 4명이 있었고 출석인원은 315명, 주일학교는 성인 1개, 어린이 3개가 있었다.   

1926년 건축한 예배당 앞에서.
1926년 건축한 예배당 앞에서.

이때의 성도들이 목회자 생활비와 만주 선교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모습은 오늘의 교인들에게 귀감이 된다. 특별히 여성들의 노력이 눈물겨운데, 앞면에 이름을 써 놓은 작은 주머니를 벽에 걸러놓고는 매일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정해진 양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내어 주머니에 담았다. 주일에 이 주머니를 교회로 보냈고 교회 재정 담당자가 이 쌀을 팔아서 헌금을 관리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일주일 한 끼 혹은 그 이상을 금식하고 해당되는 쌀을 팔아 헌금하였다. 어려운 생활 환경에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도 성미를 모으고 금식하며 헌금했던 것이다. 그 헌금으로 목회자 생활비와 만주지방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다.

이필주 목사 이야기

은퇴 후 남양교회 재파송받아 소천하기까지 목회하며 남양교회를 부흥시킨 이필주 목사
은퇴 후 남양교회 재파송받아 소천하기까지 목회하며 남양교회를 부흥시킨 이필주 목사

남양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은퇴하던 해인 1934년 3월에 부임하여 1942년 4월 소천하기까지 남양교회를 섬겼던 이필주 목사이다. 1869년 12월에 태어난 이필주 목사는 1902년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잃은 후에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이듬해인 1903년 4월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신실한 신앙생활로 1904년 권사 직분을 받았고 1907년 전도사가 되어 청파동에 기도방을 설립하고 전도하여 교회 설립에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1907년 도산 안창호에 의해 조직된 신민회에 들어가 전덕기 목사를 도와 중요한 임무를 맡기도 했던 이필주 목사는 신민회가 일제에 의해 1910년 와해되자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1911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1913년 왕십리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사역하던 중 1915년 집사 목사로 안수 받고 1918년 정동(제일)교회로 파송받았다.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선언’의 의미로 서명했는지를 물으면 달라진다. ‘선언’으로 한 이들도 있고, ‘청원’으로 한 이들도 있다. 그것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필주 목사는 몇 되지 않는 ‘선언파’에 속한다.

문: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선언서를 인쇄하여 일반에 배포하였는가?
답: 그것은 동양의 평화를 주창하며 조선의 자주 독립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원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문: 피고는 독립이 될 줄 알고 독립을 주장하였는가?
답: 그렇다. 독립이 될 줄 알았다.
문: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어디까지든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심문 과정에서 민족독립의 뜻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독립의지를 천명했던 그의 신문조서에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의 힘이 있는 한 조선의 독립에 다 함께 노력하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이필주 목사는 1934년 65세로 중부연회에서 은퇴했는데 특이하게도 남양교회로 재파송되어 목회를 이어가게 되었다. 당시 남양교회는 박영석 목사가 수원으로 이임한 후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남양구역의 6개 교회 모두 자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양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연회에서 은퇴한 이필주 목사를 남양교회로 재파송한 것이다. 당시 이필주 목사는 장작을 팰 정도로 근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W.A.Noble)이 “더 일할 수 있는데 어떻게 쉴 수 있느냐?”라며 재파송을 주선하였다.

남양교회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필주 목사에 대한 글
남양교회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필주 목사에 대한 글

이에 일경도 이필주 목사를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그러나 이필주 목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때로 길에서 그들을 꾸짖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할 정도였다. 불량배들조차 길에서 그를 만나면 길을 비켜 주며 인사 할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본 지방 7구역 중에서 어떤 구역은 진보가 되고 어떤 구역은 옛날과 동일하나 특별히 남양구역은 이필주 목사의 대대적 활동으로 죽어가는 교회가 부활하게 되어서 십일조 결심자가 많게 되며 새로 믿는 자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35년 연회에서 박영석 감리사가 보고한 내용이다. 이필주 목사는 역시 은퇴한 후 제암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익모 목사와 함께 대사경회 중에 부흥회를 인도하여 은혜를 끼쳤다. 이필주 목사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 지역 유지 두 사람이 당시에 큰 액수인 100원을 헌금하여 구역운영에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 집 고치는 연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부서진 문을 고쳐 줄 정도로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았다. 이러한 열정과 노력으로 남양구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는데 1937년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보조가 끊어졌음에도 제암리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현상 유지 하면서 연회비도 완납하였다. 

이러한 이필주 목사의 확고한 민족의식과 정성을 다한 목회 활동에 많은 젊은이와 교인들이 몰려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감시하던 경찰까지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 연회록에 나오는 박영석 감리사의 보고 내용이 당시 이필주 목사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남양구역은 이필주 목사가 노당익장(老當益壯)에 활동으로 전 구역적으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구여에서는 청년 목사를 원하지마는 이 지역에서는 노인 목사를 더 사랑하여서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일 보기를 원하며 장비(葬費)까지 저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흥하던 교회에 의외의 시련이 찾아왔으니 1940년 중부 지역을 강타한 심한 가뭄이었다. 전국 교회에서 구제금을 모아 수원, 안산, 오산, 남양구역 등에 분배해야 할 정도였다. 이들 지역의 목회자들이 생활하기조차 어려운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별도의 보조금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시련은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동방요배, 창씨개명 등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이 강요된 것이었다. 교회를 향해서는 신사참배가 거대한 파고였다. 이필주 목사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매년 삼일절마다 3일씩 금식하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성도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옥에 갇혔다가 출옥한 성도들

그러나 신사참배까지는 거부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부했다는 주장과 거부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공존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소극적 순응’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목회지를 강탈당하거나 투옥되었다.

그런데 이필주 목사는 당시에도 남양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음까지 뺏긴 것은 아니었다. 교인들과 함께 신사 앞에 서서 허리를 꾸벅하는 시늉을 하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허리는 굽힐지언정 마음만은 굽히지 맙시다” 했다는 기록(남양교회 115년사, 257쪽)이 있다. 곧 당시 상황에서 공적인 목회활동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남양교회 담임목회로 뜨겁게 보낸 이필주 목사는 1942년 4월 21일 73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가 남양에 갔을 때 5개였던 교회가 7개로 늘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를 존경하여 어떤 한의사가 장지를 내놓기도 하였다.

현재 남양교회에 서 있는 두 개의 기념비 가운데 하나는 1946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오화영 목사가 친필 휘호로 264자를 기록하였다. 두 번째 기념비는 1969년 4월 21일 삼일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해방 전 남양구역을 담당했던 허숙일 목사의 주도로 양노리에 있던 기념비를 개축하여 남양교회 마당에 세웠다. 개축 기념비에는 오화영 목사의 264자 휘호를 그대로 옮겨놓았고 이갑성 목사의 휘호도 첨가되었다.

1946년에 세워진 기념비와 1969년에 세운 이필주 목사 기념비가 나란히 남양교회 정문 앞에 서서 교회를 지키고 있다.
1946년에 세워진 기념비와 1969년에 세운 이필주 목사 기념비가 나란히 남양교회 정문 앞에 서서 교회를 지키고 있다.

해방 이후 혼란의 시기

시련의 일제강점기를 보내고 혼란했던 해방전후기를 보낸 한국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도 전에 다시한번 큰 시련이 찾아왔으니 1950년 일어난 남북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김유순 감독이 납북되어 1951년 임시총회가 부산에서 열렸고, 류형기 목사가 감독이 되었다.

일제 말기 친일(혁신)교단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춘수 통리자로부터 파면당했던 류형기 목사는 “연회에서 정회원으로 6년 이상 계속 시무한 이”라는 자격 규정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말기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모어 감독의 설득에 “이번에 한하여” 라는 조건부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3년 뒤인 1954년 제7차 총회가 열려 다시 류형기 감독이 재선되었다. 이때도 자격문제와 더불어 지난 총회의 조건부가 지켜져야 한다는 반론이 었었지만, 전쟁 후 복구를 위해서는 영어에 능통한 류형기 목사가 감독이 되어야 한다는 모어 감독의 적극적인 해석으로 류형기 감독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감리교회 두 번째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첫 번째 분열은 해방직후 일제 잔재 청산의 문제로 ‘재건파’와 ‘복흥파’로 갈라졌으나 1948년 하나로 통합했다. 류형기 감독의 재선이 법에 어긋난다며 반대하던 세력들이 1955년 3월 1일 천안제일교회에 모여 특별총회를 열었고,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것이 ‘호헌파’ 분열이었다.

이 분열로 인해 남양교회는 혼란을 맞이하는데, 담임목사가 두 명이 된 것이다. 호헌파 분열 전에 담임하던 김순경 목사가 호헌파에 가담하자 총리원측에서는 1955년 8월에 김연호 목사를 파송했다가 1956년 3월에 방부신 목사를 파송하였다. 이로써 담임목사가 두 명이 된 남양교회는 어느 한 쪽이 절대 우세가 되지 않고 양분된 상태에서 호헌파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고, 총리원파는 교회 근처의 조선시대 감옥 터에 텐트를 치고 예배 드림으로써 ‘한 지붕 두 가족’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생활은 사회 법정 판결이 난 1956년 5월 1일부로 정리되었다. 곧 총리원측의 승소로 예배 장소가 바뀌었지만, 두 세력 간의 다툼은 치열하여 많은 교인들이 천주교로 가거나 교회를 떠나 장로교회를 세웠다. 그러다가 1958년 3월 김순경 목사가 부산으로 떠나 감으로써 교회는 방부신 목사 단독체제로 자리를 잡았다. <감리회보(1957년 7월 16쪽)>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남양교회는 그동안 소위 호헌파로 인해 괴로움을 받았었는데 그렇게 세차던 풍랑도 잔잔하여져서 이미 교회당도 도로 찾고 정상적인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에는 온 교인들이 불법한 세력을 구축하였는데 담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힘일 것이다. 남양교회는 날이 거듭할수록 부흥되어가고 있음은 실로 기쁜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분열을 끝낸 교회는 1960년 3월에 부임한 양준택 목사의 노력으로 장로교회를 세웠던 교인들이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교인들과 힘을 합하여 1961년 4월에 현재의 남양동 557번지에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였다. 이후 교회는 백합유치원을 설립하여 유아교육에 앞장 섰고, 1978년 부임한 김영수 목사의 헌신으로 부흥하여 이듬해인 1979년 기존의 40평이었던 성전을 60평으로 증축하였다.

유아원 졸업식
유아원 졸업식
1966년 당회록. 재적 116, 출석 25, 결석 91 이란 숫자가 눈에 띈다. 특히 1년이상 무고 결석한 이들을 제적한 흔적이 보인다. 지금의 교회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이다.
1966년 당회록. 재적 116, 출석 25, 결석 91 이란 숫자가 눈에 띈다. 특히 1년이상 무고 결석한 이들을 제적한 흔적이 보인다. 지금의 교회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 증축한 부분이 1981년 겨울부터 내린 폭설로 1982년 2월 25일 무너졌다. 그리하여 1982년 4월 무너진 예배당을 철거하고 이듬해인 1983년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격동의 시간을 보내던 남양교회는 2018년 1월 14일 34대 담임으로 부임한 김진석 목사에 의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재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폭설로 무너진 예배당을 철거하고 새롭게 건축한 예배당(1982년)
폭설로 무너진 예배당을 철거하고 새롭게 건축한 예배당(1982년)
1960년 9월~1981년 4월까지 남양지역을 깨운 복음의 종(역사관 보존)
1960년 9월~1981년 4월까지 남양지역을 깨운 복음의 종(역사관 보존)

김진석 목사의 ‘은혜체험’ 중심의 목회

협성대를 졸업한 김진석 목사는 부천에서 에덴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7년 동안 에덴교회에서 열심히 목회하다가 율목교회 부담임으로 옮겨 4년 동안 정성을 다해 섬겼다. 그리고 이천 신갈교회 담임으로 청빙받아 15년 동안 섬기면서 지금의 신갈교회 초석을 다졌다. 현재 신갈교회 시무장로들이 김 목사의 신앙지도 아래 교회의 부흥을 위해 친형제 같이 함께 했던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 목사를 인터뷰 하던 날에 신갈교회 양경모 장로도 함께 했는데, 당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때를 떠올리며 흥분하였다.

하나님은 김 목사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상처입은 교회로 보내셔서 ‘싸매고 화합하게 하여 부흥시키는’ 목회를 하였다, 신갈교회를 쇄신하여 목회가 안정되자 다시 사동교회로 이동하게 하셨다. 신갈교회에 비해 여러모로 약했던 그곳에서 8년 목회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이루고 안정을 찾자 2년 전 ‘치유’가 필요했던 남양교회로 부임해 온 것이다.

교회 역사와 앞으로의 목회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김진석 목사
교회 역사와 앞으로의 목회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김진석 목사

김진석 목사는 자신의 목회 중점을 ‘은혜체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은혜체험은 신앙생활의 생명”이라고 강조한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신앙의 4대 원리 안에 ‘체험’을 포함시킬만큼 ‘성령체험’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목회 해 왔던 모든 교회에서 이러한 ‘신앙체험’을 강조하면서 ‘기도와 말씀’ 운동 중심으로 신앙지도를 해 왔다. 그것이 교인들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고 화합시키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화합하면 자연히 부흥이 따른다는 것이 김 목사의 지론이다.

현재 남양교회는 장년기준 재적 450명에 평균출석 320명인데, 김 목사는 5년 내 출석 500명을 목표로 온 교우들과 함께 진군하고 있다. 교회 재산은 예배당 대지 900평에 건평 360평이고, 부속건물로 카페와 교육관이 있다. 현재의 예배당에서 3분 정도 떨어진 곳에 1,800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200평의 교육관을 건축하고 있다.

1800평의 대지에 건평 200평으로 건축하고 있는 교육관
1800평의 대지에 건평 200평으로 건축하고 있는 교육관
주변 환경이 장기발전을 위해 아주 좋은 교육관 건축현장
주변 환경이 장기발전을 위해 아주 좋은 교육관 건축현장

교회 역사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남양교회에는 4대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가정이 여럿 있다. 5대를 넘어 6대, 7대로 이어져 가야 하는 과제를 두고 있기에 다음세대 목회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 건축하는 교육관에 체육관 등 다음세대를 향한 다양한 시설을 설치할 계획이다. 장학위원회를 조직하여 졸업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대학생들에게도 등록금을 지원하고 있다. 교회 출석 1/3 이상이면 누구든지 수혜자가 될 수 있다. 

김진석 목사는 ‘남양교회는 민족교회’라는 인식이 지역민들에게 있다는 점에 안착하여 지역민들을 위해 노인대학과 작은 도서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더불어 건축된지 40년 된 현재의 예배당으로는 미래를 준비하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예배당을 새롭게 마련할 계획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우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진행해 나갈 것이다.

38,000명 인구 중에서 기독교신자률 16~17%, 감리교회는 7개로 약한 곳, 경기도 화성시의 읍으로 화성시청이 소재하며 구(舊) 남양군의 중심지, 현재 최초이자 유일하게 동이 읍으로 전환된 사례(2014년 10월). 남양읍(南陽邑)을 일컫는 수식어이다. 이곳 남양에서 모교회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 온 남양교회를 찾아 그 흔적을 더듬는 시간 동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산이 열 두 번 바뀌고 한 세기도 훌쩍 넘은 123년의 세월 속에 스며든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역사를 돌아보는 이들에게는 이런 희열이 있다. 앞으로 150년을 넘어 2세기를 채워 갈 남양교회와 김진석 목사님의 목회를 응원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1909년 직접 민들어 사용했던 주기도문
1909년 직접 민들어 사용했던 주기도문
1920년 발간되어 사용되던 신약젼서
1920년 발간되어 사용되던 신약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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