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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가을에 나는 미국의 볼티모어 지역에서 미연합감리교회 부부(夫婦) 목사로 미국인들을 위한 목회(牧會)를 하고 있는 딸과 사위의 집을 방문하여 한 달간 머물렀던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 때에 시간을 내어 4시간 정도 북쪽으로 떨어진 뉴욕을 방문하였고 몇몇 분의 배재선배님들을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많은 신세를 지고 돌아 온 일이 있습니다.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드류대학을 방문하였고, 드류대학의 학장님을 만나 잠시 환담을 나눈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까운 그린 빌리지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그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
역사 속 인물
김낙환 목사
2024.03.17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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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신학대학의 학생들에게는 애정(愛情)과 동지애(同志愛)가 넘쳤습니다. 그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유대감의 표현으로, 아펜젤러의 1885년 학급은 1887년에 간결한 간증과 함께 모든 학급 구성원들로부터의 보고서를 포함한 귀중한 수업 보고서를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이미 조선에서 선교(宣敎)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885년 학급의 각 구성원들이 편지들을 인쇄하고 보고서로 발표된다는 계획을 알았을 때, 그는 친한 친구이자 급우인 줄리안 워즈워드(Julian Wadsworth)의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내며 그에게 다음과 같은
역사 속 인물
김낙환
2023.10.2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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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에 대하여 몇몇 한국의 학자들이 글을 쓰기는 하였지만 아펜젤러의 신학적(神學的) 입장에 대하여 조명(照明)하는 글은 몇 편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조선에 감리교회(監理敎會)와 근대 서양문화(西洋文化)를 전해 주신 분입니다. 그의 설교(說敎)나 일기(日記) 그리고 많은 보고서(報告書)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신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연구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감리교회 학자(學者)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펜젤러가 한국으로 오시려고 준비하셨던 1884년은 미국 감리교회가 설립(設立)
역사 속 인물
김낙환
2023.09.2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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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위대한 인물(人物)로 성장하기까지 그 삶의 뒤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가르침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펜젤러의 신앙(信仰)과 신학(神學)적 지식의 성장(成長)에는 그가 다닌 학교들의 여러 선생님들과 교수님들 그리고 특별히 드류대학의 교수님들의 수고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학자, 랭 포드의 진술은 위대한 드류대학의 다섯 명의 학자들의 태도를 포착하였습니다. 이 다섯 분의 진지하고, 엄격한 신학자들은 미국의 감리교회 목회, 교회와 해외선교 분야에서 교육받는 사역자들을 훈련하기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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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9.22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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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아펜젤러는 어학(語學)에 특별한 소질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가정(家庭)에서 12살까지는 독일어(獨逸語)를 사용했기에 독일어가 자유로웠습니다. 선교사로 조선에 살면서 독일에서 온 외교관을 만나면 독일어로 대화(對話)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어도 열심히 공부하여 조선에 온지 오래지 않아 조선말로 설교(說敎)를 하였습니다. 아펜젤러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성서번역 위원회를 통하여 신약(新約) 성경을 번역(飜譯)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더불어 성경번역 위원회를 구성하고 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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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9.19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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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류대학은 아펜젤러에게 영적(靈的)인 고향이었습니다. 그는 조선(朝鮮)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는 중에도 늘 드류대학을 그리워하였고 그 곳에서 만난 교수들과 학생들과 늘 편지를 교환하였습니다. 드류대학으로 부터의 경험 가운데 아펜젤러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그가 공부했던 교실이 아닌 예배(禮拜)였음을 드류대학 공동체 구성원에게 보낸 세 개의 편지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업햄(Upham) 교수에게 보낸 1886년 7월 10일자 편지에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있었던 ‘애찬식(愛餐式)’은 다른 어떤 예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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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9.1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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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은 한국(韓國)인들에 비하여 비교적 덜 감성적(感性的)이고, 더 이성적(理性的)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아펜젤러도 예외(例外)는 아니었습니다. 아펜젤러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성장한 개혁(改革)교회를 뒤로하고 감리교회로 이적(移積)을 하기까지 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理由)는 감리교회의 연회(年會)에 참석하고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플랭클린 앤 마샬 대학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중에 랭캐스터 제일감리교회를 참석하였습니다. 그가 감리교회에 매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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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9.1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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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아펜젤러는 조선에 감리교회를 전해 준 감리교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독일 개혁교회 속한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개혁교회에 속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가 『드류대학』을 다니기 전에 그는 『플랭클린 앤 마샬 대학』이라는 개혁교회 계통의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아펜젤러에게 이 대학은 마치 정신적인 고향과 같은 곳이었고 평생을 두고 기억하는 배움의 장소가 되었습니다.아펜젤러는 대학 졸업 후에도 프랭클린 앤 마샬의 교수들과 학생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893년 1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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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9.04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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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아펜젤러가 드류 신학대학(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을 때에, 다섯 명의 위대한 교수들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헨리 버츠(Henry Buttz), 존 마일리(John Miley), 조지 크룩스 (George Crooks), 사무엘 업햄(Samuel Upham)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3년 과정을 드류 대학에서 공부한 아펜젤러는 1882년 9월부터 1884년 12월까지 이 다섯 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공부하였습니다.모든 교수들이 아펜젤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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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8.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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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리교회는 1867년에 드류 신학대학(Drew Theological Seminary)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감리교회 창립(創立) 백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이 있었던 바로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개혁교회 계통의 《플랭크린 앤 마샬 대학》에서 4년을 마치고 아펜젤러는 이미 감리교인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했기에 당시 감리교회 계통의 대학인 드류(Drew Theological Seminary)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설립된지 15년 밖에 되지 아니한 드류대학은 영적(靈的)으로 풍성한 분위기 였으며, 세계적으로 저명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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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목사
2023.08.2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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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비유 중에는 씨가 떨어지는 네 가지 토양에 대한 말씀이 있다. 길가, 돌짝 밭,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오직 옥토만이 결실하였다. 아펜젤러가 입국한 조선말기의 문화적 토양은 어떠했을까?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조선의 역사적 상황은 암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조선은 감추어진 보화(寶貨)였던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모든 여건이 무르익었고 옥토와 같은 땅이었다. 조선(朝鮮)이란 이름이 말해 주듯이 아침의 찬란한 햇살처럼 곱고 아름다운 보화(寶華)였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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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목사
2023.08.2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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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한지 3년째 되던 해인, 1888년 6월에 서울에서는 영아(嬰兒)소동이라고 불리는 웃지 못 할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서양인들 특히, 당시 조선에 들어 온 선교사들이 조선의 갓난아이들을 납치해서 죽인 다음, 물에 끓여 이들의 눈을 빼서 밀가루에 넣고, 맷돌에 간 다음에 말려서 사진이나 약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분노(憤怒)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과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孤兒院)으로 향했다. 당시 고아원이라는 개념은 조선인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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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8.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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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가 선교(宣敎)지 조선(朝鮮)으로 오는 그 배 안에는 스크랜턴과 그의 가족들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크랜턴은 29살이었고 이미 결혼을 하여 아내와 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와 다르게 스크랜턴은 의사(醫師)출신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아펜젤러와는 다르게 선상(船上)에서 겪은 격렬한 강풍은 그가 목격한 것 중 가장 엄청난 것으로 그의 마음에 커다란 인상(印象)으로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크랜턴은 그 폭풍우가 있는 날, 선상에서 행한 아펜젤러의 설교(說敎)에 대하여 생생한 기억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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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5.24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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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내외는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 1885년 2월 대학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선교(宣敎)지인 조선(朝鮮)으로 향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향하는 한 달 여간의 긴 항해(航海)는 두 젊은 선교사 부부에게는 길고도 지루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아펜젤러는 배 위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서한(書翰)에서 태평양을 횡단하는 동안의 항해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습니다.『우리가 폭풍우를 겪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푸른 하늘은 보다 높았으며, 증기선 아래 바다는 2-4 마일의 깊은 바다였습니다. 맑은 날씨에 조용한 연못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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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5.1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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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건이나 같은 경험을 해도 서양인과 동양인의 느낌은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에 서양인들은 비교적 이성적으로 접근하는데 반하여 동양인들 특별히 한국인들은 쉽사리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가 일만 마일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선교지로 떠나는 장면에는 그들의 감정적 모습이 거의 노출되지 아니하고 비교적 차분하게 이성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1월 22일, 출발역인 랭캐스터에서 샌프란시스 코로 출발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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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5.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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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그리스도인으로 입문(入門)하는 과정은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가정에서 출생하여 부모에게 신앙을 물려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이는 여러 가지 삶의 우여 곡절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거듭 남의 경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選擇)이 아니라 필수(必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는 신앙적인 거듭남의 경험 이후에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성장과 변화에는 각 개인의 의지(意志)적인 요소
역사 속 인물
김낙환
2023.05.0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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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선교사가 선교지(宣敎地)에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기 까지에는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한 준비(準備)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펜젤러의 사역(事役)이 시작되도록 미연합감리교회 선교국(宣敎局)에서는 조선(朝鮮)선교를 준비하기 위한 수 없이 많은 전략적(戰略的) 회의(會議)들과 선교 자금(資金)을 준비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은 리드라는 당시 선교국 책임자가 아펜젤러에게 보낸 편지 글입니다.『당신이 떠날 때, 당신은 이 사역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날마
역사 속 인물
김낙환
2023.05.0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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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은 교회를 옮겨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여 출석하는 교회가 너무 멀어 출석하기가 어려워졌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자주 옮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 아펜젤러는 자연스럽게 개혁교회 보다는 감리교회가 자신의 신학적 이해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옮기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의 예상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879년 4월 16일, 아펜젤러는 필라델피아 연회를 참석한 후에 자신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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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4.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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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스위스 혈통의 가문(家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펜젤(Appenzell)이라는 이름은 예술과 시와 역사 분야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개혁교회 및 교육사, 문화사에도 빛나는 이름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펜젤러의 가문이 미국에 온 것은 1735년인데 교만한 왕의 횡포와 박해를 피해 독일계 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펜실베니아 지방으로 이주한 후 이 곳에 집단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미국 개척자였던 제이콥 아펜젤러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둘째 아들인 제이콥 Ⅲ세가 바로 헨리 아펜젤러의 할아버지입니다. 제이콥
역사 속 인물
김낙환
2023.04.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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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조선에 온 문명의 개척자로 세계 감리교회 사상 불후의 이름을 남긴 선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는 영국 사회를 구원한 J. 웨슬리가 있다면 우리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을 구한 H. 아펜젤러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감리교회의 감리교인들 조차도 감리교회의 역사(歷史) 속에 이처럼 위대한 인물(人物)을 있음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젊은 나이에 조선에 오셔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친 그의 열정(熱情)과 헌신(獻身)은 감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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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환
2023.04.06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