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한 첫 해 겨울, 주일 어린이예배가 오전 10시, 장년예배가 오후 2시에 있었다. 장년예배가 진행 중인데 ‘전도사님, 세희가 우물에 빠졌어요!’ 아이들이 뛰어 들어왔다.

정신없이 우물로 뛰어갔다. 우리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 안에 세 살배기 세희가 빠졌다. 2미터가 약간 넘는 깊이의 우물이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쪼르르 모여 서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를 꺼내려고  옷을 잡아 들어 올리다가 내가 앞으로 빠질 뻔했다. 

세 살배기 작은 아이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하고 대충 힘을 주어 꺼내려다 딸려 들어갈 뻔했던 것이다. 추운 날, 겹겹이 옷을 입었고 그 옷들이 물에 푹 젖어서 끌어 올리려니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무거웠다. 질질 끌다시피해서 건져내어 예배실 안으로 들쳐 안고 들어갔다. 그날의 예배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너무나 선명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기도가 부족했나?’

‘아니 네가 잘못하고, 네 기도가 부족하면 무슨 일이 생기나? 설사 그런들 네가 잘못하고 네 기도가 부족했는데, 왜 네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우물에 빠질까?’

이 증명할 수 없는 인과관계 해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성도들의 삶에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내 부족함 때문이다, 내 기도가 부족한 까닭이다.’

가뭄도 홍수도 다 나랏님 탓하던 시대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어쩌다가 이런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이 우물에서 동네 아이가 빠져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아이들을 교회로 보내시지 않겠구나 걱정했다. 하지만 여전한 마음으로 교회로 보내 주셔서 ‘세희가 우물에 빠진 사건’은 ‘악재’ 아니고 지난 이야기하다 보면 꼭 나오게 되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들의 수만큼 다양한 반응, 다양한 태도, 다양한 조치가 이뤄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을 향해 "네가 이 사람처럼 되면 좋겠다. 네가 이런 건 좀 저 사람에게  배웠으면 좋겠다. 좀 더 나아져라, 좀 더 달라져라" 하지 않으신 것에 감사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처럼 살게 두시고, 요한은 요한처럼 살게 두신 것에 감사한다.

심지어 가룟 유다가 자기의 길을 가도록 그냥 두신 일은 두고 두고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다. ‘왜 그런 선택을 하니, 왜 그런 마음을 먹니, 생각을 바꿔라, 이래야 된다, 혹 이러면 안된다.’ 말리지 않으신 일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일이고, 결론은 항상 감사했다.

목회는 주님의 일, 그럼에도 나의 사고, 나의 취향, 나의 선택, 나의 태도들이 뒤섞이게 된다. 목회자 자신, 인생의 굴곡 속에서 만들어진 때로 긍정적이고 때로 부정적일 수 있는 사고 체계, 태도, 삶의 방식들이 목회 여정 속에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성도들의 삶과 신앙, 이런 목회자들의 삶과 신앙이 함께 빚어져 그 교회들만의 독특한 색이 드러나는데, 주께서 마치 12명의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모든 목회자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 생긴 그대로 살며 목회하도록 두시기 때문이겠구나 싶다.

그것은 주님의 믿음, 자신감, 혹은 배짱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볼수록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때로 미신적이기까지 한 사고를 하곤 했던 나를 데리고 일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다. 남은 목회의 여정 속에서 진주보다 아름답고 귀한 깨달음, 따뜻한 체험이 계속 풍성하기를... 아멘.

세희가 빠진 그 우물,  우리끼리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세희가 빠진 그 우물,  우리끼리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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